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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님의 偉蹟을 느껴본다
  • 독도시사신문 편집국
  • 승인 2019.01.0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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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혁 박사]

때는 1989년 초 가을이었다. 북경에서 처음으로 공자사상학술 발표대회가 열렸다.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으로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의 국제적 개방이었다. 본인도 동 대회의 주제발표의 일인으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대륙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도리어 불안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국사회과학원에 근무 중인 중국인 몇 학자를 일본 세미나 때 사귄 바 있어서 한편 안도할 수 있었다. 역시 그 지인들은 북경 체류 중,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중 한 가지가 옥하관(玉河館)정보 이었다. 옥하관은 옛날 외국사신 일행이 주로 머물던 이른바 외국인 전용 여관이었다고 한다. 북경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에는 그 터 위에 18층 현대식 호텔(首都賓館)이 들어섰다. 일부 연로한 인사 중에는 옥화관에 담긴 여화(餘話: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 들은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의 경우, 그 옥화관은 청풍김씨 족보의 초보(草譜)의 명칭과 같은 점이 있어서 관심을 지니기 시작했다. 본인은 한국인 일행과 헤어져 9월9일에는 홀로 수도빈관에 투숙하면서 족보의 연원지점(淵源地點)에서 나름대로 보학상(譜學)상의 향수(鄕愁)를 누린 셈이었다. 그 향수 속에서 대동법으로 유명한 김육공(金堉公)께서 노심초사하시던 모습을 연상하며 경모의 뜻을 느끼기도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1월 하순경, 몽골의 수도 우란바타르 회의에 참석차 북경을 경유하게 되었다. 그 당시 동행인이었던, 일본 거류중인 원로 근세사학자 최서면 박사와 함께 하게 되었다.

그 때 들은 이야기다. 그는 나에게 묻기를 “崔四入”을 들은바 있느냐 했다. 금시초문이었다. 중국역사상 영의정을 4번 지낸 이는 최씨문중의 최윤(崔胤)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바쁜 틈을 내서 고서점이 모여 있는 “유리창”을 뒤져서 관계문헌과 사전류를 구입해서 귀국했다. 그리고 “崔四入“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일 것으로 여겼으나, 정말로 최씨문중에서 한 사람이 네 번이나 영의정(領議政)으로 입조(入朝)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최사입의 주인공은 당나라 시대의 “최윤(崔胤. 字는 垂休)” 이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음모에 능하고 강자와 권력자에 아부 잘 하기로 이름이 나 있어서 네 번이나 영의정이 될 인물이었지만, 종당에는 피살로 일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을 보았을 때 씁쓸한 소감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여러 번 영의정에 입조했다는 희귀한 기록유지자라는 것 뿐, 명예로운 예전자(譽傳者)로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1988년 우리나라 청풍문중 명조 중에 두 분의 귀중한 문집을 영인판으로 출간했던 일이 있다. 하나는 청사(淸沙 金在魯公)의 본말록(本末錄)이요, 다른 하나는 후제(厚齌 金榦公)의 후제전서(厚齌全書)다. 현세에 있어서도 높은 예가(譽價)로 평가되고 있는 국가수준의 전적(典籍)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는 최사입(崔四入)이 있다면, 한국에는 김사입(金四入)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사입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역사상 청풍김씨 門中에만 “金四入”이 있다는 뜻이다. 네 번이나 領議政을 지낸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淸沙公 金在魯<1682-1759>” 선생이다. 청사공께서는 50년간 출사 중 영의정을 네 차례나 지내면서도 그의 일생은 “忠 順 淸 貧”으로 一貫했다고 칭송받고 있다. 그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金四入”의 稀貴例는 이제부터라도 宣揚할 필요가 있다. 우선 中國 大辭典과 日本의 諸橋漢和大辭典<모로하시대사전, 전13권> 및 우리나라에서 발행된 한한대사전(전15권)에 보정판 편찬 중 수록될 수 있도록 전파하여 중국의 “崔四入”과 비교될 수 있는 특유의 자랑임을 알려야 할 것이다. 아울러 동 문중 차원에서는 전국 요지 요가(要地要街)를 몇 군데 선정하여 “김사입탑”을 건립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온 국민들로 하여금 준거(準據)의 표상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김사입과 더불어 월천 김길통공(月川 金吉通公)의 녹권(祿券)을 원형대로 석각하여 조선조 제8대 成宗大王 3년 <1472년>에 賜給 받은 祿券은 대한민국 문화재 보물 제716호(忠北大學博物館소장)로 1991년3월18일에 指定되었다. 녹권에 記載되어있는 기록문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참으로 감동 어린 나라님의 충정이 넘쳐나고, 아울러 우리 後孫들에 이르기까지 無限의 保國愛民의 책임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다.

즉 청풍인이여! 가뭄으로 인해 백성들이 괴로워할 때에는 단 비가 되어주고, 수재로 말미암아 강을 건너야 할 때에는 배가 되어달라는 임금님의 애절한 당부의 어지(御旨)가 담겨있다. 생각컨대 이는 시한성(時限性)이 없는 청풍인에게 내리신 어명으로 존중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명에는 소멸시효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문평공 종중에서 종인의 의사를 모아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그 밖에도 厚齊 金榦<1646-1732>公의 경세교훈(警世敎訓)에 준하는 禮學과 以文敎化의 德化力을 발휘했던 유덕과 그리고 地方自治의 탁견을 보여주신 割鷄論 등은 현대 자치행정사에 있어서도 귀감이 될 것이다. 김간 선셍의 예학은 북경대학이 향후 16년간 계획으로 추진 중인 유장(儒藏:신형사고전서)에 수록서지로 이미 선정되었다. 그리고 조선조 세종대왕에 버금으로 존경받고 있는 정조대왕께서 정조 자신이 나의 군사부(君師父)로 모시고 싶다는 夢梧 김종수公에게 얽힌 佳話도 불망의 寶錄자료의 일부가 아닐까 사려된다. 이외의 사례는 지면상 생략한다. 영세불망의 위적을 남긴 우리 조상님 열현조(列賢祖)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후예가 되어야한다. 열현조는 고갈되지 않는 수원과 같다. 따라서 우리들 후손은 長江이 되어 흐를 수 있다는 자부심을 견지하고 현조선양에 최선을 다하는 良孫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마땅하다.

 

독도시사신문 편집국  dokdosi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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